[보이스피싱의 시발점 '변작'](상)'010' 번호 뜨는 '보이스피싱'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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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경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간 보이스피싱 범죄 발생 건수는 5878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7%가 증가했다. 특히 전체 피해액과 건당 피해액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각각 120%, 188%가 늘어난 3116억원, 5301만원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 중 상당수가 해외에서 유입된 변작기를 통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본지는 변작기로 빚어지는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을 3회에 걸쳐 싣는다.

9일 경찰청 등에 따르면 정부의 지속적인 단속과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불법 변작기를 활용한 보이스피싱을 비롯한 휴대전화 사기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명 '심박스(Sim Box)'로 불리는 번호 변작기는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장비다. 다수의 유심칩을 장비에 꽂아 발신번호를 바꾸는 것이 기본 기능이다. 주로 중국에서 제작, 유통된다. '070'으로 시작되는 인터넷전화나 해외에서 건 전화를 국내 휴대폰 사용자가 발신한 것처럼 '010' 번호로 바꾸는 형태로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특성상 보이스피싱 조직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보이스피싱 조직은 해외 전화번호나 070 같은 인터넷 전화를 사용했는데 이런 번호가 보이스피싱이라고 의심을 받자 이를 역이용해 심박스로 010이나 한국 지역번호로 변경해 보이스피싱을 하는 것이다. 주로 국내 통신사에서 사들인 선불폰 유심을 심박스에 삽입해 중국 등 해외나 인터넷 전화로 전화를 걸면 010번호나 한국 지역번호로 발신번호를 변경할 수 있다.

실제 지난해 3월에는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이 중국·태국·남아공 등 다국적 외국인으로 구성된 역대 최대 규모 보이스피싱 발신번호 변작중계기 운영조직을 적발하고 총 21명을 검거해 구속기소했다. 올해도 통신사와 경찰청이 공조해 다수의 변작기를 통한 보이스피싱 의심 사례를 적발했다.

경찰은 '공유기를 설치해 주면 급여를 준다'는 내용의 아르바이트 구인광고가 보이면 절대로 지원하지 말고 신고할 것을 당부했다. 문제의 아르바이트에 지원하면 공유기와 비슷하게 생긴 장비를 주는데 사실은 번호를 변작하는 데 쓰는 중계기다. 의도하지 않더라도 변작중계기를 집에 설치해서 구동하게 되면 보이스피싱 공범이 돼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경찰청이 적발한 전화번호 변작 중계기
경찰청이 적발한 전화번호 변작 중계기

정부와 통신사는 이런 상황에 대응해 미인증, 미신고 중계기에 대한 단속에 나서고 있으나 중고 스마트폰 몇 대만 가지고 있어도 만들 수 있는 워낙 간단한 기기인지라 쉽지는 않다. 또 최근 변작기를 통한 보이스피싱은 물건을 대량 구매하고 나타나지 않는 '노쇼' 사기, 대출 사기, 카드 사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법 중계기로 피해가 잇따르는 가운데 최근 A금융계열사가 실시한 고객 대응 콜센터 시스템 개선 사업에 번호 변작기 업자가 입찰한 사례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해당 사업자는 010 번호로 상담 연결 확률을 높이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워 입찰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실제 전화는 유선 혹은 인터넷 전화로 걸면서 고객에게는 010 발신번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담 업무에서 010 번호를 사용하려면 이용하는 회선만큼의 이동통신단말기를 구매하고 단말기별로 개통해야만 한다. 하지만 비용 차원에서 유심칩만 꽂으면 되는 번호 변작기 시스템을 활용해 비용을 낮추려는 의도다.

업계는 기업이 번호 변작기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기술 자체는 합법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지만 현실은 사기, 스팸, 피싱 등 불법 목적이 많은 만큼 업계 신뢰 확보 차원에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문제 해결을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정부, 통신사, 기업이 다각적으로 공조하는 조치를 취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한 번호 변작으로 업계의 통화 신뢰성을 저해하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쫓다가 업계 전체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변작기가 불법적 활용이 많다는 점에서 기술·법적 대응 및 투자에도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현황 (자료 경찰청)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현황 (자료 경찰청)

이경민 기자 kmlee@etnews.com